어느 날은,
내 마음속 짐승 한 마리가 너무 날뛰는 것 같아
산으로 올라가 보기로 했습니다.
서울 관악산 줄기 호암산자락, 낯익은 아파트 단지를 지나
차츰 나무들이 말을 걸어오는 길을 걷다 보면
너무도 조용한 곳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호압사,
이름부터가 묘합니다.
'호랑이의 기세를 누른 절'이라니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곳이 왕이 세운 절이며, 관악산의 흉한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 지은 절이라고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곳은,
내 안의 분노, 불안, 의심,
그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감정들이
서서히 숨을 고르게 되는 자리였습니다.
약사전 앞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어디선가 조용히 바라보는 눈길 하나가 느껴집니다.
바로 약사여래불입니다.
사람들은 그분이 병을 고치는 부처라 말합니다.
몸의 병도, 마음의 병도,
말로 꺼내기 힘든 상처까지
그저 가만히 지켜보며
낫기를 기다려주는 분이라고요.
정작 우리는
누군가의 위로보다는
스스로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힘을 원하잖아요.
약사불의 존재는 바로 그 묵묵한 기다림에 가깝습니다.
"아프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 아픔마저도 네 삶이야."
이렇게 속삭이는 듯한 침묵.
그 침묵이, 이 절엔 있습니다.
호압사는 작습니다.
크지 않은 마당, 오래된 느티나무와 돌탑 하나,
그리고 단정한 범종루가 있는
작은 절집.
하지만 그 작음이
마음에 여백을 줍니다.
크고 화려한 절에서는 얻을 수 없는
속삭임 같은 위로를 건넵니다.
그리고 산의 기운이 절을 감싸며 말해줍니다.
"여기선 울어도 괜찮아."
"여기선 말하지 않아도 돼."
누군가,
도시에 지쳐 말이 줄고
마음이 툭 꺼져내릴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 같습니다.
"서울엔 호랑이를 잠재운 절이 하나 있어.
그곳에서 내 안의 야성을 내려놓고
조용히, 자신을 어루만져볼 수 있지."
이 글은
당신 마음속의 소란이 조금 가라앉길 바라는 마음으로 씁니다.
그 호랑이가 너무 사납게 굴 때,
호압사에서 잠시 머물러 보세요.
어쩌면 약사불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당신을 그냥
‘괜찮다’며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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